선동열(사진 왼쪽부터)과 최동원은 한국프로야구가 낳은 최고의 스타이자 성공한 야구인이다. 이들에게 배워야할 건 눈에 보이는 기록이 아니라 기록을 작성할 때까지의 눈에 보이지 않는 노력들이다(사진=KBO) |
직장인의 목표는 성공이다. 야구선수도 같다. '성공한 야구선수'가 되려고 야구에 자신의 모든 걸 건다. 빠르면 10년 안에 성공하지만, 대기만성형 선수는 20년이 넘게 걸리기도 한다. 하지만, 대개의 선수는 성공의 터널을 통과하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좌절하다 소리없이 사라진다. 그래서일까. 성공한 야구인들은 말한다. "설령 실패하고 좌절하더라도 용기까진 잃어선 안 된다"고.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한다. "성공하려면 성공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스포츠춘추>에서 성공한 야구인들로부터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하는 7가지 법칙'을 들었다.
LG 김기태 2군 감독은 야구실력뿐만 아니라 대인관계도 뛰어난 이었다(사진=LG) |
베이브 루스가 아무리 뛰어나도 베이스볼보다 뛰어나진 않다.
사회생활에서 원만한 대인관계는 필수다. 그러나 사회생활에 성공하려면 그 이상이 필요하다. 야구계도 마찬가지다. 현역시절은 모르겠지만, 차후 지도자가 되려면 성공적인 대인관계가 절실하다.
대표적인 예가 있다. A씨다. 현역시절 천재로 이름을 날렸던 A씨는 은퇴 후에도 한국프로야구의 대표적인 레전드로 꼽힌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원체 두각을 나타낸지라, 늘 ‘자기중심적’이란 소릴 들었다.
프로에서도 ‘독불장군’으로 불린 A씨는 은퇴 뒤 바로 코치나 감독이 되지 못했다. 한참을 야구계와 떨어져 살았다. 그렇다면 그는 어째서 명성보다 지도자가 늦게 된 것일까.
A씨를 잘 아는 야구인들은 하나같이 “원만하지 못했던 대인관계”를 이유로 꼽는다. 반대되는 이도 있다. LG 김기태 2군 감독이다.
현역시절부터 ‘마당발’로 불렸던 김 감독은 별명답게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었다. 소속팀 선수뿐만 아니라 다른 팀 선수들과도 친분을 쌓았고, 굳이 야구계가 아니더라도 다른 직종에 종사하는 이들과도 끈끈한 관계를 맺었다.
특히나 김 감독은 특유의 보스 기질과 카리스마로 처음 만난 사람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김 감독은 “선배라고 뒷짐을 지면 후배들이 앞에선 따라도, 마음속으로 우러러 따르진 않는다”며 “대인관계의 핵심은 결국 솔선수범”이라고 말한다.
김 감독은 LG에 오기 전,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다. 무명의 한국인 코치연수생을 바라보는 요미우리 선수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일본인 코치들도 김 감독을 보며 ‘야구를 얼마나 알겠느냐’고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얼마 후 한국의 지도자 연수생은 명문 요미우리의 2군 정식코치가 됐다. 외국인 코치 연수생이 요미우리 정식코치가 된다는 건 일본야구계에선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건 김 감독이 밤늦게까지 남아 선수들을 돌보고, 그들의 고민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공부한 야구기술과 이론도 일본인 코치에 비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다.
김 감독은 “그라운드에서 동료와의 팀워크가 중요하듯 사회생활에서도 원만한 대인관계가 중요하다”며 “현역시절 짧은 인기에 안주하기보다 여러 사람을 만나 다양한 관계를 맺는 게 현역보다 몇 배나 긴 인생에선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맞는 말이다. 베이브 루스가 제아무리 뛰어나도 베이스볼보다 뛰어나진 않다. 야구가 ‘투수놀음’이라고 해도, 그 놀음을 지켜줄 동료 야수가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성공하고 싶다면, 자신만큼이나 자신의 주변을 잘 챙겨야 한다. 어차피 내 능력을 스스로 평가하면 ‘자기 자랑’이 될 뿐이다. 평판은 타인이 하는 것이다.
장점을 최대한 활용해 단점을 보완하는 건 멋진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멋지고 빠른 길은 단점을 극복하고, 장점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양준혁처럼 말이다(사진=삼성) |
장점은 신이 내리지만, 단점은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
타율 3할 타자는 영원히 기억된다. 그러나 영원한 3할 타자는 없다. 그것이 야구다. 최근 은퇴를 선언한 삼성 양준혁은 영원한 3할 타자가 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특히나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예가 있다. 2002년 양준혁은 프로 데뷔 이후 처음으로 3할을 기록하지 못했다. 주변에선 “양준혁도 나이를 먹은 모양”이라며 “이제부터 내림세를 탈 것”이라고 예상했다. 대개 이럴 때 많은 선수는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을 고집하거나 속으로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믿으며 자기 위안에 바쁘다. 그러나 양준혁은 달랐다. 솔직히 자신의 단점을 인정했다.
“그즈음 ‘아, 지금까지 해온 걸로는 안 되겠구나’ 싶었다. 체력적으로도 그렇고 나이도 30대 중반에 접어드니까 젊었을 때와는 감이 달랐다. 그때부터 실패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타격폼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정말 우연하게 예전 사진을 컴퓨터로 보게 됐다. 내가 한쪽 팔을 놓으면서 마치 만세하는 자세처럼 타격하고 있지 않은가.”
양준혁의 트레이드 마크인 만세 타법은 그렇게 탄생했다. 양준혁은 만세 타법으로 다음 해 타율 3할2푼9리 33홈런 92타점을 기록했다. 33홈런은 개인 한 시즌 최다홈런이었다.
양준혁은 후배 선수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야구는 단점과의 싸움이다. 상대의 단점을 파악해 공격하고, 내 단점을 찾아내 방어해야 이길 수 있다. 대타자가 되고 싶다면 자신의 단점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는 게 우선이다.”
정확한 지적이다. 장점은 신이 내리지만, 단점은 신이 도와도 극복할 수 없는 문제다. 오직 자신의 의지로만 해결할 수 있다. 단점을 간과한 이상, 성공은 결코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임창용(사진 왼쪽부터)과 삼성 선동열 감독은 때를 기다린 이다. 중요한 건 '때'를 기다리기까지 얼마나 준비하느냐는 것이다. 준비없이 때를 기다리는 건 무인도에서 우편배달부를 기다리는 것과 다름없다(사진=삼성) |
하고 싶은 일보단 잘 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빛이 난다.
현역시절 삼성 선동열 감독은 16승5패10세이브 평균자책 1.21을 기록하고도 연봉이 삭감되는 불운을 맛봤다. 소속팀 해태가 워낙 가난한 팀이라, 연봉인상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입이 쫙 벌어질 정도로 대단한 성적을 기록하고도 연봉이 깎여야 한다는 건 선 감독에겐 굴욕 이상이었다.
참다못한 선 감독은 해태의 짠돌이 정책에 반발해 연봉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나왔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은 해태 프런트는 크게 당황했다. 그러나 해태 구단주 박건배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박 회장은 프런트의 고위간부를 불러 “선동열 연봉을 맞춰주려면 껌을 몇 개나 팔아야 하는지 아느냐”며 “흔들리지 말고 기존의 연봉정책을 고수할 것”을 지시했다.
만약 선동열이 크게 낙담해 현역생활을 관뒀다면 그의 일본행은 성사되지 못했을 터. 하지만, 선동열은 참고 또 참았다. 그리고 결국, 1996년 주니치 드래건스에 6억 엔을 받고 입단했다.
2007년까지 삼성에서 뛰었던 임창용도 2008년 일본프로야구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30만 달러(약 3억5천만 원)에 계약을 맺었다. 분명히 ‘국외 진출’이었지만, 그리 큰 주목은 받지 못했다. 삼성에서 받았던 연봉 5억 원보다 낮은 금액에 계약한데다 2005년 말 오른쪽 팔꿈치 수술을 받으며 내림세를 타던 그가 과연 재기할 수 있을지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창용은 미련없이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로부터 3년 후, 임창용은 연봉 5억 엔(약 84억 원) 규모의 초대박 계약이 예상되는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마무리 투수가 됐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한신 타이거스 등 일본 최고명문구단이 그를 영입하려고 백방으로 뛰고 있다.
임창용은 말한다. “만약 눈앞의 이익에 충실했다면 한국에 남았을 것”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꿈을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더 큰 행운을 손에 쥘 수 있었다”고.
향후 임창용은 많은 야구선수에게 ‘때를 기다린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온몸으로 알린 선수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잊어선 안 되는 게 있다. 때를 기다리기 전,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사람의 꿈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빛나기도 하지만, 잘 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가장 빛나는 법’이다. 그리고 해야할 일을 할 때 보석처럼 빛난다. 꿈을 현실로 만들고 싶다면 냉철하게 자신의 능력과 한계 그리고 현실을 판단하고, 때를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다 한번 결정되면 후회없이 인생을 불사를 용기가 필요하다.
강기웅은 현역시절에도 스타였지만, 야구계를 떠나 사회란 거대한 그라운드를 밟을 때도 스타였다. 병원 사무장을 거쳐 지금은 청과업을 하는 강기웅은 말한다. "야구선수로서 오랫동안 뛰며 배웠던 경험과 지혜가 사회생활에 큰 도움이 됐다"고. 세상에 가치 없는 경험이란 없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전(前) 직장의 장점을 활용하라
한국시리즈 6회 경험에 빛나는 LG 박종호는 올 시즌 은퇴를 앞두고 “두렵다”고 고백했다. 최고의 투수들과 겨뤄도 절대 위축되지 않았던 그가 두려움을 느낀 이유는 간명했다.
“야구 말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이랴. 많은 선수가 은퇴 후 진로를 두고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평생 야구만 했던 그들에게 야구 없는 사회생활은 보호장비 없이 공을 받는 포수 신세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야구판을 떠나 새로운 길에 들어서고, 성공까지 거둔 전직 야구선수도 많다. 삼성 출신의 강기웅은 은퇴 뒤 의료계에 투신했다. 장인이 운영하는 지방병원에서 사무장으로 일했다. 얼마 후 그 병원은 지역에서 가장 큰 병원으로 성장했다. 강기웅의 노력이 컸다.
그가 특수화물차(레커차) 운전사들과 택시 기사들을 상대로 새벽까지 영업을 펼친 건 지역에서 유명한 일화다. 그의 노력 덕분에 사고만 났다 하면 레커차 운전사들과 택시 기사들이 앞다퉈 그의 병원을 찾았다고.
1999년 해태(KIA의 전신)에서 내야수로 뛰다 은퇴한 최희창은 골프 캐디로 전업해 성공을 거둔 경우다.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투어에서 캐디로 활약한 바 있는 최희창은 국내 최고의 여자프로골퍼 서희경의 백을 매기도 했다.
해태 포수 출신의 최해식은 광주에서 가장 큰 중식집을 운영하고 있다. 은퇴 뒤 직접 철가방을 들고 배달을 시작했던 그는 이때의 경험을 밑천 삼아 광주에 ‘최고루’라는 중식당을 차렸다. 현재 최고루는 연 매출 12억 원을 자랑하는 기업형 중식집으로 성장했다.
야구판을 떠나 이직에 성공한 전직 선수들은 하나같이 “야구선수들은 오랫동안 단체생활을 경험해 ‘나보단 우리’란 의식이 강하고, 엄격한 선후배 관계를 경험해 예의도 바르다”며 “훈련할 때의 심정처럼 ‘여기에 모든 걸 건다’는 일념으로 사회생활을 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라고 강조한다.
‘새로운 도전’은 기대와 의욕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동전의 양면처럼 위험과 두려움을 동반한다. 기대와 두려움 사이의 간극을 줄이고 싶다면 ‘기존의 경험’을 새로운 도전의 발판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전 직장의 경험과 장점을 다음 직장에서도 최대한 살린다면 도전에 대한 두려움은 크게 줄 것이다. 아차피 일의 성격이나 진로의 방향은 달라도 인생을 관통하는 기본 법칙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2005시즌이 끝나고 이승엽이 지바롯데를 떠나 삼성으로 돌아오려 고민할 때 김성근(현 SK 감독) 지바롯데 코치는 "네 정신부터 고쳐야 한다"고 쏘아붙였다. "돌아갈 곳이 있으니까 그만큼 절박하지 않는다"는 게 김 코치가 화를 낸 이유였다. “과거의 친정팀 삼성을 잊고 일본에서 끝장을 본다는 마음으로 승부를 걸라”고 조언한 김 코치의 말을 이승엽은 그대로 따랐고, 이듬해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었다. 사진은 KIA 김상현(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절박하지 않은 노력은 노력이 아니다.
2001년 해태에서 데뷔했을 때 김상현은 ‘제2의 김봉연’으로 불렸다. 그만큼 대형타자가 기대됐다. 그러나 프로 데뷔 1년 후 LG로 이적했다. ‘발전 가능성은 풍부하지만, 성공 가능성이 작다’는 게 해태가 그를 보낸 이유였다. LG에서도 타고난 힘으로 대형 내야수로 주목을 받았으나 성적은 2008까지 통산 398경기에 출전해 타율 2할4푼5리, 33홈런, 132타점에 그쳤다.
당시 김상현의 별명은 ‘2군 배리 본즈’였다. 1군에선 성적이 죽을 쑤지만, 2군만 가면 홈런을 밥 먹듯이 친다고 붙여진 별명이었다.
결국, 김상현은 2009년 4월 중순 친정팀 KIA로 트레이드됐다. 이때부터 드라마 같은 반전이 시작됐다. 김상현은 이적 후 바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시쳇말로 ‘쳤다 하면 홈런’이었고, ‘주자만 있다 하면 타점’이었다.
그해 김상현은 타율 3할1푼5리, 36홈런, 127타점이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을 내며 정규 시즌 MVP에 올랐다. 팀을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이끈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김상현은 자신의 성공 비결을 ‘절박함’으로 표현한다. 틀린 말도 아니다. 김상현은 KIA에서도 주전 자리를 확보하지 못하면 야구계를 떠나 생활전선으로 뛰어들려 했다. 갑상샘암으로 고생한 아내를 위해서라면 뭐라도 밥벌이를 해야 했다.
절박했던 김상현은 ‘이번이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2009년 동계훈련장에서 몇 배는 많은 땀을 쏟았고, 역시 ‘마지막’이란 각오로 자신이 그토록 하고 싶던 타격폼으로 치기 시작했다. 결과는 대박. 김상현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을 때 비로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더라”며 “절박하지 않은 노력은 노력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맞는 말이다. 절벽 끝에 선 사람만이 산의 높이를 안다. 물론 절벽에 서지 않고도 산의 높이를 아는 이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절벽 끝에 몰리고서야 산을 내려다본다. 이때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절박함으로 인생을 대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한다면 절벽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지금 뒤를 돌아보라. 당신의 뒤엔 무엇이 있는가.
'천재' 최동원은 알고 보면 '천재적 능력을 타고난 이'가 아니라 '천재적 성실함을 타고난 이'였다(사진=KBO) |
천재는 없다. 노력하는 천재만 있을 뿐
'최동원과 선동열 가운데 누가 최고의 투수인가' 이 질문을 인터넷에 던지는 건 조수가 밀려오는 바다에 썩은 고기 한 점을 던져 넣는 것과 같다. 허기진 게들이 달려들 듯 야구팬들이 모여 작심하고 댓글 전쟁을 벌이기 때문이다.
최동원과 선동열은 그처럼 훌륭한 투수들이었다. 그 가운데 최동원은 ‘천재 투수’로 알려졌다. 시속 150km의 강속구와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커브는 태어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유형의 공이 아니었다.
그러나 최동원은 고개를 흔든다. “타고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뼈를 깎는 고된 훈련 덕분에 만들어진 공”이라고 말한다. 고교 시절 최동원은 집 뒷마당에 마운드를 만들고, 18.44m가 떨어진 곳에 그물망을 설치했다. 그는 밤마다 혼자서 그물망을 향해 1천 개씩 공을 던졌고, 발에 물집이 생길 때까지 러닝을 계속 했다.
프로에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틈나면 개인사를 즐기는 동료 선수와 달리 최동원은 고교시절처럼 혼자서 투구연습을 했다. 그는 “하루 100개 이상 투구연습을 하지 않으면 팔이 녹스는 기분을 느꼈다”며 “식사는 걸러도 훈련을 거른 적은 없다”고 털어놨다.
그러한 훈련 덕분일까.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은 혼자서 4승을 챙기며 소속팀 롯데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지금도 최동원은 ‘천재형 선수는 없다’고 믿는다. 오직 “천재가 되려고 노력하는 선수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타고난 능력도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고만고만한 수준에 머문다. 수많은 야구선수가 타고난 능력만 믿다가 더는 발전하지 못하고, 사라지곤 했다. 능력이 있다는 건 복이다. 그러나 그 능력을 더 극대화시키는 건 선택이다.
김성근 감독은 원칙주의자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말한다. "김 감독은 유연한 원칙주의자"라고(사진=스포츠춘추) |
원칙과 융통성은 별개가 아니다.
윤군필 SBS 스포츠 부국장은 40년 전의 추억을 잊지 못한다. 1970년 마산고에서 야구선수로 뛰었던 윤 부국장은 당시 강도 높은 훈련 탓에 늘 숨이 찼다. 그 훈련을 시킨 이는 다름 아닌 ‘야신’ 김성근(SK) 감독이었다.
당시 20대 후반의 열혈 청년이었던 김 감독은 약체 마산고를 1년 만에 경남지역 강팀으로 이끄는 기적을 연출했다. 그 기적 뒤엔 강도 높은 훈련이 있었다.
하루는 김 감독이 선수들에게 “서울에 일을 보러 갈 테니 자율훈련을 하라”고 지시했다. 선수들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김 감독이 사라지자 선수들은 운동장에 삼삼오오 모여 오랜만의 휴식을 즐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김 감독은 서울로 떠나기 전, 학교 뒷산에 올라 망원경으로 선수들을 보고 있었다. 얼마 후, 김 감독은 산에서 내려왔고, 선수들은 숨이 끊어질 때까지 운동장에서 굴러야 했다.
윤 부국장은 “김 감독은 눈이 세 개 있는지 선수들의 표정만 봐도 그 선수의 상태를 안다”며 “그러한 혜안이 오늘의 ‘야신’ 김성근을 만든 배경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김 감독은 프로에서도 고된 훈련으로 선수들을 조련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김 감독의 지도법이 꼭 훈련에만 의존하는 게 아니란 걸 아는 이는 적다.
김 감독은 팀이 연패하거나 분위기가 좋지 않을 때면 “술 한잔들 하고 와라”하며 주장에게 용돈을 건넨다. ‘프로는 압력 밥솥과 같아서 수증기를 내보낼만한 구멍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셈이다.
원칙과 융통성을 별개로 아는 이가 많다. 그러나 아니다. 인생에선 원칙을 지키면서도 융통성을 발휘해야할 경우가 더 많다. 융통성을 효과적으로만 발휘한다면 원칙을 지키는 데 큰 힘이 될 수 있다. 단, 원칙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